그것은 너의 말이다_온라인프로그램북

2024. 6. 10. 10:5724_그것은 너의 말이다

온라인 프로그램 표지 설명: 짙고 붉은 정사각형 전체를 채우는 수많은 작고 긴 흰색 직사각형들의 무늬가 있다. 길고 짧은 각양각색의 직사각형들은 수직과 수평을 이루며 포개지거나 흩어져 있다. 규칙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막상 규칙을 찾기는 어려운 무늬이다. 정사각형 아래로 역시 짙은 붉은색으로 공연 제목이 석 줄에 걸쳐 쓰여져 있다. 그것은. 너의. 말이다. 폰트는 성경책의 그것을 연상하게 한다.

 

상상만발극장 믿음의 기원 연작

그것은
너의
말이다

작/연출 박해성

 

2024.06.14.-06.23.

아르코예술극장소극장

 

공동기획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상상만발극장

제작 상상만발극장3


순서

여정

대화

믿음의 기원

그것은 너의 말이다

출연진

창작진

제작진

상상만발극장


여정

매 순간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이라는 믿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연결된다는 믿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의 원인이 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는 나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에까지 연결돼, 모든 결과에는 원인과 이유가 있다는 믿음은 이 세계의 모든 행동과 선택, 삶을 지탱하는 근간이 됩니다.

 

하지만 개인과 세계는 종종 이런 원인과 이유를 찾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원인을 찾는들 그 고통은 사그러들지 않고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과 분노, 절망과 자책에 우리의 삶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 고통 속에 우리는 모든 것의 원인이자 이유인 존재를 찾기도 하고, 세계의 인과관계를 직접 만들어 '이야기'에 녹여내 몰입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기원은 우리가 지금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연극을 경험하는 방식을 '믿음'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내온 연작 작업입니다. <믿음의 기원 1>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믿음의 기원 2: 후쿠시마의 바람>은 과학이라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다루었습니다. <스푸트니크>는 더 나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다루었고, <도덕의 계보학>은 도덕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다루었습니다. 이 연작은 극장에서 믿음이 작동되는 방식을 이야기와 재현에 기대지 않고 구현하는 형식을 만들고 발전시켜왔습니다.

 

맞닥뜨리는 모든 결과에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다루는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믿음의 기원을 찾아 2011년부터 이어온 연작 작업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재난과 참사의 시대에 공동체의 힘으로 맞서려는 끊이지 않는 노력과는 별개로, <그것은 너의 말이다>에서는 시간과 공간, 개연성과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극장적 응시로 고통의 이유를 찾아야만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연을 마주합니다.

 

믿음의 기원 1 2011 두산아트랩(쇼케이스) 2012 예술공간서울 2013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소극장

믿음의 기원 2: 후쿠시마의 바람 2015 2018 아르코예술극장소극장

스푸트니크 2019 나온씨어터 2020 서강대메리홀소극장 2022 아르코예술극장소극장

도덕의 계보학 2021 대학로예술극장소극장 2022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소극장

그것은 너의 말이다 2024 아르코예술극장소극장

 

*위 연보의 연도를 통해 해당 공연의 정보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대화

* 아래는 [믿음의 기원] 연작의 시작부터 함께한 강지혜 디자이너와 10년의 시차를 두고 함께하기 시작한 김상훈 드라마터그의 대화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상훈
[믿음의 기원]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얘기를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처음에 어떤 얘기들이 있었길래 이런 형식이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지혜 
2011년 두산아트랩으로 시작했어요. 극장(스페이스111)의 빈 공간과 이동식 객석의자가 전부였죠. 무대세트를 제작할 예산은 없었지만 낭독공연처럼 보이지 않길 원했어요. 관객과 배우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시작에 “믿음의 기원”이라는 제목도 있었죠.

상훈
희곡이 먼저 있었던 거군요.

지혜
오래된 기억이지만, 믿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고민이 길었던 것 보면 그런 것 같아요. 관객들이 시각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미장센을 피하려고 노력했어요. 배우의 대사에만 의존하여 상상하고 공연에 대한 관객 각자의 믿음이 생겨나길 바랐죠.

상훈
1이랑 2랑 희곡에서의 관점이 엄청 바뀌어 있는 게 통시적으로 보면 신기했어요. 진일보했다고 볼 수도 있겠고. 근데 희곡이 있었고 그거에서 형식에 대한 제안이 생겼고 그 형식에 대한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쓴 게 2였던 거네요.

지혜
맞아요. <믿음의 기원1>을 통해 구성된 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이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가능하다는 실험이 되었고 연결까지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좀 더 확장된 이야기들이 적극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 같아요.

상훈
‘낭독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라는 게 신기했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생각해보면 공연이랑 낭독이랑, 어떻게 구분하자면 이렇게 그냥 의자 두고 그냥 하면 낭독이잖아요.

지혜
그래서 무대디자인이 아닌 공간디자인을 고민했어요. 우리가 늘 공연에서 접하는 무대를 고민의 시작으로 두는 것이 아닌 함께 있는 공간에 대한 고민이었죠.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적을수록 집중은 커지잖아요. 배우들이 움직이는 몸의 소리, 목소리의 움직임 등등 청각적인 부분을 공간에 담고 싶었어요. 공간의 구조를 배우의 모든 것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든다면 낭독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상훈
처음에 쇼케이스 봤던 사람 중에 이걸 낭독이라고 여긴 사람들도 있었겠네요?

지혜
그때도 지금도 처음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혼란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습득하지 못한 방식이고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의자와 배우, 관객만 있는 낭독의 형태이니까요.

상훈
<믿음의 기원1>은 쇼케이스 포함해서 세 번 공연했잖아요. 11년도 쇼케이스. 12, 13년도. 그 사이에서 형식들이 좀 많이 변모를 한 편인가요?

지혜
11년 쇼케이스는 무대표현 방식이 거칠었어요. 설명으로 보이는 시각적인 디자인을 차단하고 싶었고, 그 결과 배우와 관객이 함께 빛 속에 있도록 디자인했어요. 쉽게 얘기하자면 작업등 켜놓고 쇼케이스를 한 거죠. 말 그대로 일방적이었고 정리되지 않은 날것이었어요. 관객들이 불편함을 표현하기도 했으니까요. 12년 공연 때 김형연 조명디자이너가 들어오면서 빛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저도 주로 조명디자인 작업을 하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는 선후배 관계이자 동료로 많은 대화들을 나누게 되었죠. 배우에게 더 집중하면서 설명은 피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했어요. 빛이 장식이 되지 않고 공간의 질감을 살릴 수 있는 표현방식이 되길 바라왔고 지금도 그 고민은 진행 중이에요.

상훈
이번은 아무래도 기존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잖아요. 대본이, 아무래도.

지혜
우선은 <믿음의 기원>시리즈의 종점이라고 생각되니 함께 해온 작업자로서 다르게 다가오죠. 계속 우울했던 분위기는 그대로이지만.

상훈
추상적 형식과 구체적 대본이 아니라 꽤 추상적인 대본을 사용하고 있잖아요.

지혜
박해성 연출이 <믿음의 기원>시리즈를 통해 지금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믿음이라는 키워드로 다루어 왔다면, 다음 연작으로 여러 세계들에 대한 감각을 본격적으로 응시하기 위한 [다세계극장]을 준비 중이에요. 그 고민 속의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라고 생각해요. 박해성 연출의 전작인 <미래의 동물>(상훈 작) 작업도 그 과정에 있었고요. 그가 말하고 있는 믿음을 마주하며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상훈 
이게, 13년 간 발전시킨 연작을 거의 말미에 들어와서 작업한 사람으로서, 이번에 좀 정리하는 글을 쓸 때 이론적으로 유추한다는 말 아래 넘겨짚거나 오독하는, 물론 오독에 열려 있는 극장은 항상 중요하지만, 그런 오독 말고 좀 뭔갈 쓸데없이 명확하게 하는 오독 같은 게, 두려웠었는데 말씀들이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낭독에 대한 얘기 같은 건 정말 처음 들었고 거기부터 생각해보니 <믿음의 기원>을 통시적으로 관찰했을 때 변곡점 같은 게 좀 더 구체적으로 느껴졌 던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믿음의 기원

지금 - 여기에 도착하는 길고 의아한 통로(들)

우리는 대상을 더 잘, 더 아름답게, 더 윤리적으로 인식할 수는 있지만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는 없다.


극장은 물질의 운동을 상징으로 변환한다. 때문에 극장의 서사는 여기 있는 것들의 연결이 아니라 여기 없는 것들의 연결로 파악된다. 결과적으로 극장을 여기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이 도착하는 장소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여기 있는 것들을 항상 소거하는 장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극장 밖에서도 매일 일어나고 점점 더 많이 일어난다. 이미지의 범람 안에서 여기 있는 것은 언제나 가장 먼저 소거된다. 그런 세계에서 사건이란 여기 있는 것으로부터 추론된 것, 그리고 추론된 것으로부터 추론된 것에 대한 것이다. 어느새 추론의 연쇄는 너무 길어져서 여기 있는 것을 망각시킨다. 그 세계에서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거울의 시대의 거울이 되어 무한한 자기증식의 무의미한 귀퉁이가 되는 일이다. 연극은 추론한 것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추론을 발생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유라는 건 없었습니다. 인과 관계라는 건 일들이 다 지난 다음에 짜맞춰서 만들어내는 거니까요. 하지만 인과관계가 없다고 해서 내가 겪었던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닙니다. 지금과 어떤 이유로 연결되는지 설명할 수 없을뿐이지요. (도덕의 계보학)

 

[믿음의 기원] 연작은 창작과정에서 관객보다 앞서 발생하는 추론들을 소거한다. 새를 위해서 깃털을, 바다를 위해서 파랑을, 슬픔을 위해서 울음을, 분노를 위해서 고성을 극장에 두는 일을 거부한다. 새는 새고 깃털은 깃털이다. 깃털 사진은 깃털이 아니다. 파란 빛은 파랑이 아니다. 우는 연기는 울음이 아니다. 둘 수 있는 것만을 둔다. 이때 둘 수 있는 것은 물질의 운동뿐이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것을 여기 있게 하는 일이다. 이동한 것. 멈춘 것. 떨어진 것. 밝아진 것. 방향을 바꾼 것 등 기초적 물질적 운동이 몸에 일으키는 일차적임 감각들로부터 관객들 각자에게 추론이 발생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관객들만큼의 장면들이 명멸한다.

이는 미적 형식이기 이전에 정치적 형식이다. 박해성 연출은 2011년 믿음의 기원 1 쇼케이스 소개글에서 이렇게 밝힌다.

물음의 시작은 간단했습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왜 서로를 해칠까’입니다. 역사와 경험으로 그것이 서로를, 혹은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 행동을 하는지 그 원리를 알고자 창작을 이어갔습니다. (중략) 이제 물음은 이 믿음이 왜 발생했고, 어떻게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내는가로 이어집니다.


선택은 나머지의 소거를 전제한다. 일정한 추론들을 미리 선택하고 배치하여 특정한 이야기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그 나머지 가능성들을 배제한다. [믿음의 기원] 연작은 그 어떤 확정적 세계도 선택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를 극장으로 불러들인다. 지금 여기가 어떤 곳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정할 권한이 모두에게 분유된다. 이 분유가 극장을 분열하고 그 분열이 대화를 정초한다. 갈라진 틈새로부터 지금 여기에 작동하는 공동체가 창발하는 것이다. 희곡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흘러가지 않기에 분유도, 분열도, 대화도, 공동체도 완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연 내내, (바라건대) 공연이 끝난 후까지도 공동체의 작동을 실천하게 된다.

이 경험은 어지러움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어지러움은 자신 또는 주위 사물이 정지해 있음에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을 말한다. 객체에 대한 판단과 몸의 경험이 불일치할 때 발생한다. 이건 단지 느낌이 아니다. 극장은 매순간 미세하게 진동하며 분열하고 있다. 지금의 응시에 대한 관객들 사이의 판단이 시시각각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의미의 운반이 아니라 의미의 공-산을 도출한다.

아주 먼- 데를 쳐다보면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아주 먼-데를 봐야돼, 그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아주 조용해져 그럼, 그래서 바다를 본 거야. 아주 먼- 바다를 본 거야, 먼 바다는 움직이지 않거든 (믿음의 기원2 : 후쿠시마의 바람)


이 어지러움으로부터 우리는 역사화되지 않고 계속 지금-여기로 남아있는, 그래서 열려있는 시간을 조우한다. 그것은 과거 혹은 여기가 아닌 곳으로부터 왔다고 생각되는 시간들이다. 사실 아직 닫히지 않고 완결되지 않았는데 몇 가지 추론과 습관에 의해 사라졌다고 믿어진 시간들이다. [믿음의 기원] 연작에서 장면과 장면 사이 대사의 시공간을 엇갈려 엉켜놓는 작법은 이를 언어화한다. 계속되는 과정 속에서 완결을 유예하는 공동체는 지금 여기로 다시 열린 시공간들을 마주하고 숨은 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믿음의 기원] 연작은 공연 중반부에 빛과 음악이 별안간 극장을 가득 채우는 장면을 배치해왔다. 공연에서 거의 유일하게 스펙타클이라고 할만한 구간이다. 제작진은 이 시간을 인터미션이라고 부른다. 그 말처럼 이 장면에서 관객은 안도감을 느낀다. 분열이 잠시 유예되고 처음으로 극장이 하나로 봉합되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극장에 있는 사람들은 섬광과 함께 처음으로 하나의 공통된 시공간을 응시하게 된다. 거기를 걷는 배우들은 배역까지도 벗으며 지금 - 여기에 함께 도착한 다중시간을 소환한다. 이 일종의 메시아적 경험 이후 관객들은 다시 분열된 극장으로 돌아오는데, 분열 - 통합 - 분열의 경험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공동체를 이해하는 습관을 재감각한다.

대답을 못들었던 건 묻지 않아서였겠지요. 어떤 답은 영영 아무도 묻지 않아요. (믿음의 기원1)

 

[믿음의 기원] 연작은 일관되게 재난을 다룬다. 여기서 재난은 불가해하게 일어난 고난들을 지칭한다. 기존의 반복 경험에서 형성된 예측 혹은 관습의 이해범위를 상회하는 사건들에 인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그 사건을 해석하려 분투한다. 하지만 이해가능한 가설들은 번번이 무너지고, 믿음에 배신당하며, 허무에 빠진다. 본 연작의 텍스트들은 그 감정의 중간 과정들을 그릴 뿐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장면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후일담이 되지 않은 채 여전히 이 극장에서 열린 시간을 몰고 들어올 수 있다. 그것이 재난을 역사로 물화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서 여전히 미래로 열린 운동의 과정으로 극장에 소환한다.

그러니까 [믿음의 기원] 연작은 사실은 아무것도 완결되지 않았으며 시간이 여전히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어 지금 당장 대화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연극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지, 대체 어디로 이끌지는 몰라도, 모든 배제되고 소거된 지금-여기들은 다시 극장으로 도착한다. 우리는 비로소 각자 여기에 모일 수 있다. 거기서부터 이제 정말로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여기만 벗어나면 어디든 천국인데 (스푸트니크)

 

드라마터그, 김상훈


그것은 너의 말이다

여기 없는 것들이 확장하는 공동체의 가능성

여기 있는 것에 다가서기 위해선 여기 없는 통로를 비집는 사유의 곡예가 필요하다.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믿음의 기원]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본 공연의 제목은 성경에서 빌려왔다. 빌라도가 심문 중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가 한 대답이다. 상정한 결과가 먼저 있고 그 결과에 맞추기 위해 기원 없는 말로 질문하는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신적 존재가 인간에게 한 말이라는 점에서 이 제목은 기원이 기원을 묻는 기이한 믿음의 고리를 노출한다.

이번 작품에도 재난에 인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기존 연작과 구별되는 것은 혼자 분리된 시공간에서의 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등장해서도 한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물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인과를 찾으려 분투한다. 각자로 분리된 시공간에서 분투하며 나오는 말들은 사변적 접근을 위시한 독백이 된다. 때문에 몇몇 장면은 강한 추상성을 띈다. [믿음의 기원] 연작은 추상하는 양식과 반대로 구체적 텍스트를 가지고 제작해왔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아주 의아한 텍스트다.

이런 변화는 동시대의 새로운 실재성, 특히 뉴미디어 시공과 팬데믹 이후 실재성의 반영으로 보인다. [믿음의 기원]은 “우리의 마음은 하나를 관찰하는 것에서 관찰하지 못한 다른 하나에의 신념으로 옮겨간다.”는 흄의 사유에서 영향을 받아 고안됐다. 그에 반응하는 정치적 형식으로서 직접 감각할 수 있는 운동성 이상의 추론, 특히나 재현을 소거한 연극 만들기를 실천해왔다. 하지만 동시대의 실재성이 이 사유를 초과하고 있다는 징후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무엇보다 추론의 연쇄가 너무 길어졌다. 다양한 미디어와 행위자로 재연결된 현대의 시공에서 추론의 연쇄는 역추적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방향의 팽창을 거듭한다. 최초의 운동과 그것이 촉발하는 감각, 그로부터 추론된 사유의 관계성이 전복되기 시작한다. 추론된 것이 최초의 운동인 사유와 실재들이 생겨나며 추론들은 독자적인 구조와 배후세계를 가진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매일 인터넷에서 인간에게 접촉하지 않을 데이터와 이미지가 얼마나 많이 생산되고 있을까?) 어떤 세대는 그에 따라 고향 없는 노스텔지어를 느끼기도 하고 근거 없는 멜랑콜리를 앓기도 한다. 운동과 추론의 실재론적 위계는 평평해지며 그것을 일별하는 일은 윤리적 딜레마를 포함한다.

결국

마지막 어스름도 다 사라지고 온통
까맣게 어두워진거야

어디까지가 나무인지 어디부터 덤불인지
다 한 덩어리처럼, 사람처럼, 무슨
짐승처럼

 

이에 최초의 운동을 남기고 소거하는 [믿음의 기원]의 전략은 최초의 운동이 되는 추론으로부터 일정 범위의 연쇄를 포착하는 전략으로 이동한다. 또한 이 평평해진 실재론은 언어를 기표 수준으로 떨어트리는데 이는 의미를 위해 선형적 어순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시간 감각을 더욱 비선형적으로 만든다. 이제 희곡은 의미적으로도 시간성으로도 추상화된다.

이 (비교적) 추상적인 텍스트를 [믿음의 기원]의 형식으로 물질화하는 과정은 부드럽지 않았다. 연습 과정에서 기존 연작의 기준을 적용할 때 적지 않은 예외상황이 발생했다. 추상에 추상을 겹치면서 오히려 시공이 평면적으로 흐르는 일도 잦았다. 이에 기존 연작의 기준에서 소거할만한 재현 혹은 추론의 양식들에 열린 태도가 요구됐는데, 기준과 시점을 바꿨을 때 은폐된 소거와 배제의 측면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본 연작의 정치성이 발현하는 과정이라고 느껴졌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전환을 병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 혹은 그로 인해 -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연작이 탐색해온 정치적 시공간의 가능성에 한층 더 열려있는 텍스트이다. 미리 선택된 추론들에서 물러나면서 [믿음의 기원]이 창출하고자 한 것은 무엇보다 다원적으로 열린 시공이다. 모든 방향으로 열린 시공은 과거를 역사 속으로 밀어넣지 않고 미래로 휘말리지도 않는다. 여기서 발생하는 다종다양한 대화와 새 공동체는 결국 낯선 구원의 통로를 발견한다. 이 구원은 비선형적이고 총체적인 시간 경험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제대로 충분히 말해지고 관찰되지 않은 것, 너무 일찍 과거가 되어버린 것,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잔존하던 것, 은 불확실한 미래에서 기우제 지내듯 추구하는 통념적 구원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된다. 기존 연작에서도 이런 시간성은 계속 탐구되어왔지만, 본 작업의 추상성은 이 시간의 ‘열림’을 더 총체적으로 완수한다. 구체성이라는 틀이 없는 발화들은 실재/비실재, 과거/미래의 구분을 허물고 더 다양한 존재들을 향해 극장과 몸을 열어젖힌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사유를 읽어낼 수 있다. 구체적 발화를 통해 구성된 기존 연작은 어떤 서사적 희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결말부는 대화가 완결되지 않아도 일소된 상태를 제시하곤 했다. 필요 이상의 태도로 해결책을 주장하는 태도에 대한 경계가 읽히기도 한다. 무엇보다 구체적 발화로 이루어진 장면들은 구원이 됐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의 영역에서 멈춰야 했다. 서사로의 구원은 이 사건을 완결시키고 과거로 보내도록 작동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상에 의해 다방면으로 열린 인물들은 극 내에서 직접 구원의 가능성을 실천한다. 그 실천이란 다름이 아니라 어떤 시공간 혹은 층위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에 남은 흔적으로든 사념체로든 비존재로든 사변적 존재로든. 결국 완결되지 않은 과거로서 도착해 서로의 가능성으로 연대하는 것이 <그것은 너의 말이다>의 인물이 실천하는 구원이다. 이에 본 공연의 결말부는 기존작과 반대로 대화를 일소하지 않고 지속되는 가능성으로 남겨놓는다.

연작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그것은 너의 말이다>는 기존 작업의 범위를 기이한 방식으로 확장한다. 완결되지 않는 대화와 공동체를 추구하기 위해 강령으로 삼은 구체성이 은연 중에 설정해놓은 한계점(들) - 가령, 죽음 이후 - 을 돌파한다. 강령화된 구체성을 위반하면서 경계를 확장하고 기존 한계 바깥의 존재자들을 불러모으는 방식은 [믿음의 기원]이 기존 연극에 문제를 제기한 방식과도 비슷하다. 연작에서 실험된 비판적 형식이 연작 자체를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이제 어쩌면 우리는 누구와도 말할 수 있다. ‘우리’와 ‘누구’와 ‘말’이라는 범위가 끝없이 확장되어 겹쳐진다면 말이다. 이제 ‘너’가 단지 ‘너’가 아닐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너의 말이다.

 

드라마터그, 김상훈


출연진

선명균 남자1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대학과 연극>, <노스체>, <스푸트니크>, <도덕의 계보학>, <산악기상관측>, <코리올라너스>

 

문현정 여자1

<누수공사>, <스푸트니크>, <죽음의 집>, <보도지침>, <외국인들>, <쉬쉬쉬잇>, <준대로 받은대로>, <실수연발>

 

김현 남자2

<역사탐험연구소>, <낮은 칼바람>, <미래의 동물>, <천만 개의 도시>, <코리올라너스>, <당통의 죽음>,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 한번 없이 흐느낌으로>

 

전혜인 여자2

<히라타 오리자를 위한 유튜브 스크립트>, <연극 안 하기 - 영화관 가기>, <연극 안 하기 - 연극 했다고 치기>, <미래의 동물>, <다페르튜도 쿼드>, <연극 안 하기 - 단단히 경고하기>, <걸리버스>

 

*해당 출연진과 창작진의 이름을 통해 playdb에 기록된 작업들로 연결됩니다. 


창작진

작/연출 박해성

<역사탐험연구소>, <은하철도의 밤>, <미래의 동물>, <스푸트니크>, <도덕의 계보학>, <천만개의 도시>, <코리올라너스>

김상열연극상 2020, 윤영선연극상 2018

 

무대 강지혜

무대디자인 <미래의 동물>, <도덕의 계보학>, <스푸트니크>, <아는 엔딩>, <믿음의 기원 2: 후쿠시마의 바람>, <믿음의 기원 1>

조명디자인 <와이프>, <튜링머신>, <로미오와 줄리엣 앤드 모어>, <더 웨일>, <엔젤스 인 아메리카>, <추락II>, <그을린 사랑>

 

조명 김형연

<활화산>,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파랑새>, <신파의 세기>, <미래의 동물>,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 <비비비>

 

사운드 목소

<인정투쟁; 예술가 편>, <영지>, <그로토프스키트레이닝>,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의상자문 홍문기

<새들의 무덤>, <와이프>, <튜링머신>, <더 웨일>, <미래의 동물>, <세일즈맨의 죽음>, <엔젤스 인 아메리카>

 

조연출 조서연

<역사탐험연구소>, <연극 안 하기 - 연극 했다고 치기>, <미래의 동물>, <곰이 말했다> 

 

무대감독 이라임

<오차의 범위>, <커튼>, <미래의 동물>, 

 

드라마터그 김상훈

<히라타 오리자를 위한 유튜브 스크립트>, <연극 안 하기 - 영화관 가기>, <연극 안 하기 - 연극 했다고 치기>, <미래의 동물>, <연극 안 하기 - 단단히 경고하기>, <비둘기처럼 걷기> 

 

* 이 연극은 저작자의 동의를 구하고 『죽은 자의 집 청소』(김완, 김영사)에서 일부 설정 등을 참고했습니다.

흔적을 통해 한명 한명의 삶을 바라보고 만나는 시선과 수행의 영감을 주신 저자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작진

조명팀장 김병희

조명프로그래머 이혜지

조명팀 정태진 이호정 김주슬기 임수연

음향팀 박진아 정명군

 

조명오퍼레이터 조서연

음향오퍼레이터 김윤지

 

접근성매니저 박하늘

사전음성소개 대본 및 녹음 박하늘

한글자막해설제작 및 오퍼레이터 곽동우

접근성 모니터링 강보름 김경림 홍성훈

접근성운영협력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사진기록 옥상훈

홍보물디자인 박먼지

 

제작PD 이시은

공동기획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상상만발극장

제작 상상만발극장3


상상만발극장

극장에 있는 관객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배우들은 극장에서 어떤 존재가 되는지,

이들이 만나는 극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극장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탐구에서 우리의 연극은 시작됩니다.

극장에서 우리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지금의 세계를 집요하게 응시합니다.

2008년부터 창작을 이어온 유연하고 역동적인 작업공동체입니다.

 

상상만발극장1: 극장의 최소단위를 실현합니다.

상상만발극장2: 극장의 가능성을 확장합니다.

상상만발극장3: 집중된 창작의제를 통해 극장의 맥락을 다시 짓습니다.

 

은하철도의 밤 2023

미래의 동물 2023

스푸트니크 2022,2020,2019

도덕의 계보학 2022,2021

아는 엔딩 2020

코리올라너스 2020,2016

뒤 돌면 앞 2019

믿음의 기원 2: 후쿠시마의 바람 2018,2015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2017

파티: 그로테스크챔버앙상블 2017

3분 47초 2015

믿음의 기원 1 2013,2012,2011

천 개의 눈 2013

영원한 너 2012

아이에게 말하세요: 가자지구를 위한 연극 2011,2010

타이터스 2011,2009

비상사태 2010

십 이분의 일 2009

 

수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

믿음의 기원 2: 후쿠시마의 바람 2015

 

다음 공연

 

연극철지남

2024.08.16.-08.18.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조서연 연출, 조서연 이라임 김상훈 박해성 공동구성

상상만발극장1

 

하얀 밤을 보내고 있을 너에게

[벽산예술상 희곡상 수상작]

2024. 11.1.-11.10.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김마딘 작, 박해성 연출

상상만발극장2, 벽산문화재단

웹페이지 imagineat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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