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잃어버린 딸을 찾아낸 남편. 하지만 억겁의 무게로 그 동안의 세월을 살아오며 부부는 딸에 대한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됐다. 마침내 돌아온 딸과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세 사람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우리의 마음은 하나를 관찰하는 것에서 관찰하지 못한 다른 하나에의 신념으로 옮겨간다.” - 데이비드 흄
사람이 자신의 삶과 관계를 맺는 모든 현상의 과정을 다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은 경험하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경험하지 않고도 경험해온 것을 통해 그 인과관계를 ‘추론’합니다. 삶이 점점 복잡해지고 많은 관계를 맺어가면서, 혹은 죽음과 자연재해 등 생활의 영역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정도의 현상을 받아들이면서 각각의 세계에서 직접 경험한 것보다 ‘추론’한 결과물의 비중이 점점 커져만 갑니다.
이 ‘추론’은 모든 것이 인과관계를 따른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근대 철학자 흄이 이야기하듯, 어쩌면 논리나 과학 역시 이러한 ‘믿음’의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가치관으로, 이데올로기나 종교로 확장되어 다시 사람들의 행동과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믿음’은 이성과 논리보다 더 먼저이기에, 그것들로 설명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만들어가는 세계는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못할 것입니다.
물음의 시작은 간단했습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왜 서로를 해칠까’입니다. 역사와 경험으로 그것이 서로를, 혹은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 행동을 하는지 그 원리를 알고자 창작을 이어갔습니다.
그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아는 ‘죄의식’을 안고도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십이분의 일>, 2009), 복수는 끊임없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복수를 행할 수밖에 없었던 타이터스(<타이터스>, 2009)를 통해 그 ‘왜’를 묻던 중, 그들 각자가 만들어낸 ‘세계’를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꿈의 세계가 결국 자신들을 옥죄어오는 것을 알았을 때 중산층의 평범한 사람들이 택하게 되는 행동(<비상사태>, 2010), 자신들을 희생자로 규정한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행동에 어떤 당위성을 얻게 되는지(<아이에게 말하세요:가자지구를 위한 연극>, 2010)를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결국 ‘믿음’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물음은 이 믿음이 왜 발생했고, 어떻게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내는가로 이어집니다. 이 질문은 사람들 각자의 하루의 일상에서부터 역사와 과학, 이념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봤을 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연극적 형식으로, 혹은 비연극적 형식으로 계속 이어갈 이 질문의 미약한 시작으로 가족을 둘러싼 네 사람의 이야기, <믿음의 기원>이라는 작은 발걸음을 내딛어봅니다.